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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정보

625 전쟁 6·25(육이오)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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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6월 25일 625 전쟁이 발발했던 동족상잔의 날입니다.

 

여러분은 625 전쟁 - 한국 전쟁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625 전쟁은 정확히 말해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위 38°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이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반도 전쟁을 뜻하며 한국 전쟁이라고도 불립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공산군은 38선 전역에 걸쳐 전면 남침을 개시하였습니다.

 

사전에 계획하고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북한군이 전쟁 초기에 우세하였습니다.

 

무방비상태에 있던 한국에 대한 북한의 기습공격은 6월 27일에 이미 서울을 점령하였고, 7월 3일에는 한강을 넘어 남진을 계속하였습니다.

 

일본에 주둔 중이었던 미 제24보병사단이 한국으로 이동해 북한의 진격을 저지하려 했으나 전세를 만회하지는 못했습니다.

 

유엔군은 부산을 거점으로 한 낙동강 방어선을 확보 후 반격의 기회를 노렸습니다.

 

 

 

그리고 유엔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총반격을 시작함과 동시에 미 제1해병사단과 제7사단으로 이루어진 제10군단 및 5,000명에 달하는 한국해병대가 9월 15일 새벽에 인천 월미도에 기습상륙하였고, 다음날 인천을 함락시켰습니다.

 

미 해병대와 한국군은 서울 탈환을 목적으로 동쪽으로 진군하였고, 미 제7사단은 남쪽으로 진군하여 북상하는 유엔군과 오산에서 합류하여 북한군은 남북으로 단절되었고, 한반도의 중부 및 동부산악지대로 패주하였습니다.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은 9월 26일 서울에 진입하였고, 9월 29일에는 서울수복 기념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수도를 탈환한 유엔군은 동해안과 서해안을 따라 38선에 가깝게 계속 북상하였습니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것을 계기로 전세가 완전히 뒤집혔으며, 서울 수복과 전세의 호전은 한국 정부의 숙원인 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였지만, 유엔군의 참전 목적과의 일치 여부로 쉽게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강대국들간의 전면전쟁을 막기 위해서 지상군 및 공군이 소련이나 중국의 국경을 넘는 것을 엄히 금하였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호전됨에 따라 9월 27일에는 38선 이북에서의 군사작전을 허가하였습니다.

 

1950년 10월 7일에 유엔총회는 한반도의 통일과 부흥에 관하여 압도적 다수(찬성 47:반대 5:기권 7)로서 새로운 결의를 채택하였습니다.

 

이로써, 유엔군이 38선을 넘어서 진격하는 것은 허락되었고, 이 날짜로 유엔군의 북진도 본격화하였습니다.

 

다만, 정책적 배려로서 한국군 이외의 유엔군은 소련 및 중국 국경에서부터 240㎞(150마일) 밖에서만 그 행동이 허용되었습니다.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던 한국 제1군단은 10월 10일에는 원산을 점령하였고, 26일에는 미 제10군단이 상륙하여 한국군을 지원하였습니다.

 

 

 

10월 1일에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사무총장에게 한국의 통일을 위해 지원할 것을 제시하였으나, 유엔 한국문제중간위원회는 10월 13일에 북한지역을 한국 정부의 통치 아래 두지 않을 것을 명백히 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총선거가 행해질 때까지 유엔군사령관의 통치 아래 둘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그리고 맥아더사령관에게 한국 정부의 권한을 38선 이남에 국한시킬 것과 북한에 새로운 민간행정기구를 설치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한국 정부가 추구하는 통일정책은 계속 유엔과 마찰을 빚었습니다.

 

한국 정부의 통일정책은 유엔의 전쟁 목적 아래 방해를 받기에 이르렀으며, 잠재적인 위협세력이었던 중공군이 정식으로 개입되면서 전황은 다시 역전되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11월에 중공군이 개입을 하였고, 12월에는 평양을 비롯한 38선 밑으로 남진하였으며,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을 다시 점령당했습니다.

 

당시 피난을 위해 서울을 떠난 행렬을 일컬어 1.4후퇴(일사후퇴)라고 칭합니다.

 

이후 625 전쟁 도중 여러 가지 사건을 거쳐, 맥아더의 해임, 아이젠하워의 대통령 당선 등이 있었고,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휴전이 성립하였습니다.

 

 

 

625전쟁이 있었던 것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많은 영향이 있었습니다.

 

625 전쟁으로 인해 미국의 세계적 위상이 강화되었으며,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심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중화인민공화국을 널리 알리게 되었습니다.

 

한편 일본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기울고 있던 일본의 경제가 한국전쟁으로 인해 살아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본이 625 전쟁의 군수 물자 공급을 통해 재미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남한이 140만명, 북한이 290만명, 유엔군 15만명, 중공군 90만명의 인구 감소가 발생하였습니다.

 

대한민국 내적으로는 반공사상의 강화, 생존을 위해 미국과 우호적으로 지내야한다는 친미 마인드, 처참한 경제와 군사적 피해의 복구를 위한 노력, 그로 인한 군부 세력의 강화로 군부의 정권 장악 발생 등 역사적으로 많은 일들이 625 전쟁 이후 이어져온 한국 역사의 한 페이지씩을 장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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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간략하게 625 전쟁의 흐름에 대해 돌이켜보았습니다.

 

이 육이오 전쟁으로 인해 한국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남한과 북한 모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 외의 이해관계자들의 피해나 영향도 있었지만, 그에 대해 더 이상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가장 큰 사실은 625 전쟁으로 인해 우리 민족이 큰 아픔을 겪었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예전에 어떤 일이 왜 어떻게 있었는지 625 전쟁에 대해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625 전쟁을 비롯한 한국 역사에 대한 많은 관심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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